전신기 발명한 모르스(1791-1872)  
◎ 첫 송신 성경구절 인용 *믿음굳건*
    /가난·주위의 냉대 하나님의지로 극복
    /평생 선교사업·성직자 양성기관 후원

우리 나라 젊은이들이 장차 근무하기를 가장 선호하는 직장은 과연 어디일까. 수년전 한 통계조사에서 젊은이들은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유수의 재벌이 아닌 한국통신을 꼽아서 커다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처럼 오늘날 정보통신분야는 빠르게 세상을 변혁시키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고 있다. 모르스는 바로 지금부터 꼭 150년 전에 전신기를 발명하여 이 정보통신 산업의 시발을 알린 사람이었다.
사무엘 모르스(1791~1872년)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찰스타운이라는 곳에서 유복한 기독교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무엘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듯 그의 부친 제디디아 모르스(1761~1826년)는 유명한 성직자이면서 지리학책을 내기도 한 학자였다.
흥미있는 것은 이 지리학 교과서가 노아의 홍수를 강력하게 옹호하고 있으며 성경적 연대기를 그대로 지구역사에 도입하고 있는 점이다. 그 외에도 노아의 방주 안에 과연 어떻게 모든 동물을 실을 수 있었는지를 학문적으로 논하는 등 성경적 관점으로 일관한 책이었다.
이것을 통하여 볼 때 독립초기의 미국은 청교도 정신에 따라 모든 교육이 성경적 관점에서 행해지고 있었으며 자연과학의 해석도 진화론적 관점이 아닌 성경적·창조론적 관점을 일관되게 다루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부친의 신앙에 따라 사무엘을 포함하여 그의 세 아들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는 철저한 기독교학교와 기독교대학인 예일대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사무엘이 한평생 그리스도인으로서 커다란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밑거름이었다. 사무엘 모르스가 자신이 발명한 전신기로 최초로 송신한 내용이 성경구절이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훗날 전신기를 개발하기까지 고난과 경제적 어려움과 주위의 냉대가운데서도 그는 하나님만을 의지하였으며 선교사업과 성직자 양성기관을 후원하던 평생을 일관되게 하나님께 충성한 열심있는 신앙인이었다.
이런 사무엘은 어린 시절 미술에 대단한 관심과 재능을 보였다. 아마 전신기의 개발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면 모르스는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는 화가와 조각가로서 상당한 경지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장남인 사무엘의 이런 예술적 취향을 반기지는 않았으나 아들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어 마침내 그를 영국으로 유학을 보내게 된다. 사무엘의 나이 20세 되던 1811년이었다.
모르스의 예술적 재능은 영국 유학에서 개화하기 시작하였으며 대중적 명성도 얻게 되었다.
「헤라클레스의 죽음」이라는 작품을 이름? 조각전에 출품하여 특선을 차지한 것도 이때였다.
그가 제5대 미국대통령 제임스 먼로의 초상화와 프랑스 태생으로 미국 남북전쟁의 영웅으로 알려진 라파엣 장군의 초상을 그린 것이나 25세 되던 1815년 국립미술관의 초대관장을 역임한 것에서도 그의 예술적 재능을 엿보게 한다. 어쩌면 그런 예술적 재능이 고도의 과학적 재능으로 전이되어 위대한 발명에 이르렀던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이런 예술적 재능을 가졌던 그가 무슨 이유로 조금은 엉뚱하게 느껴질 만큼 전혀 생소한 전신기의 개발에 매달리게 되었던 것일까? 여기에 관해서는 몇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 대서양 횡단중 전신기개발 착상/미국 의사통해 전류통하는 전자석 구경/고향교회서 주일학교도 개설 복음전파

1832년12월 모르스는 유럽으로부터 대서양을 횡단하여 미국으로 가는 눌리호라는 배를 타게 되었다. 눌리호는 사람과 우편물을 함께 태우고 다니는 여객선이었다. 여기서 모르스는 찰스 잭슨이라는 미국 의사를 만나게 된다. 그는 당시로서는 매우 희귀했던 전기실험을 프랑스에서 구경하고는 그 자랑을 여객들에게 늘어놓고 있었다.
잭슨은 프랑스에서 전자석도 하나 선물로 받아 가지고 와서 배 안의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전류가 통하면 쇠붙이가 자석으로 변하게 되는 전자석은 영국의 월리엄 스타전이라는 사람이 7년 전 발명한 것이었는데 당시로서는 신기한 물건이었다.
여객들 틈에서 전자석과 전기실험에 관한 잭슨의 이야기를 말없이 경청하던 예술가 모르스에게는 어떤 청사진이 하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화가인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설계도가 마련되고 있었고 그것은 점점 구체화되었다.
『선장님, 이제 얼마 후에는 세계가 깜짝놀랄 전신기의 개발 소식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발명품이 바로 이 눌리호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이렇게 선장에게 작별인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이 일화는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부터 그의 전신기 개발이 본격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전신기에만 매달린 것은 아니었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가 고향교회에서 시작한 주일학교는 미국 최초의 주일학교 가운데 하나였다.
이렇게 그는 기독교 교육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다시 전신기 개발에 관한 에피소드를 하나 더 살펴보자.
전신기 개발을 본격화하기 훨씬 이전 모르스는 전신기의 발명에 대한 또 다른 소명과 동기가 있었던 것 같다.
미술 공부하러 그가 영국의 런던에 도착하던 1811년은 미국과 영국 사이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당시 영국은 미국 선박들이 적성국인 프랑스에 물품을 공급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미국선박들을 선제 공격하였다. 그리고는 영국은 미국과 화해를 모색하게 되는데 대서양을 넘어 수개월 후 이 메시지가 미국에 전달되었을 때 이미 미국은 영국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한 후였다. 결국 이 분쟁은 2년이 지난 후 마감되었지만 평화협정이 서명된 이후에도 양국의 일부 군함들은 분쟁이 해결되었다는 정보를 듣지 못한 채 싸움을 계속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계속 발생하였다. 신속한 통신의 부재가 이런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1825년에는 개인적인 불행도 맞게 된다. 미국 코네티컷주의 뉴 헤븐이라는 곳에 있던 그의 젊은 아내가 급작스럽게 사망하게 되었는데 당시 그는 아내가 있던 곳으로부터 5백㎞나 떨어진 곳에 있었으므로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편지가 일주일이나 지난 후 그에게 배달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통신이 발달되었다면 이런 모든 일들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거듭된 일들이 그에게 전신기를 개발하는 촉매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발명가로서 모르스 외 또 다른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의 동생 시드니와 함께 개발한 물 펌프와 대리석 절단기계도 있다. 또한 그는 당시 프랑스에서 시작된 사진기술을 배워 미국에 전한 미국 최초의 사진사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모르스는 당시 학생들에게 별난 것에 관심이 많은 괴짜 미술교수였던 것이다.

◎ 실패연속… 11년만에 개발성공/재정적 어려움 등 온갖 역경 믿음으로 극복/󰡒영광받을 분은 나아닌 오직 그리스도일뿐󰡓

아무튼 1832년 전자통신에 대한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갖고 유럽여행에서 돌아온 모르스는 뉴욕대학의 미술과 조각교수로 있으면서 5년 동안 같은 대학 화학교수로 있던 레오널드 게일 교수의 도움을 받아 연구에 전념하게 된다.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에게 하나 더 필요한 것은 바로 실험에 따르는 재정문제였다. 그는 돈 많은 사람들과 미국정부에 이 일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자금지원을 요청하였지만 어느 누구도 이 일에 재정적으로 후원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는 영국 등 유럽을 오고가면서 동분서주하였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을 수 없었다.
재정적 어려움과 더불어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는 완전히 무일푼이 되어 끼니를 걱정할 만큼 방황을 거듭하였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그렇듯 그도 환난을 통하여 인내하는 법을 배우고 연단을 거쳐 성숙된 신앙인이 되어 갔는지 모른다. 이런 고통스런 기간은 무려 11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떠난 적이 없었다. 이때의 상황을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렇게 일이 안 풀린다는 것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 모든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른 섭리라는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지요」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 아닐 수 없다.
1843년 끈질긴 노력 끝에 결국 모르스는 전신기에 관한 정부의 관심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한다. 최초의 전선은 수도 워싱턴으로부터 약64㎞ 떨어진 볼티모어까지 연결되었다.
1844년 5월24일 금요일 마침내 역사적인 날이 왔다. 모르스는 조금은 긴장되면서도 감격한 표정이었지만 먼저 전신기 앞에 앉아 조용히 묵상기도를 드렸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신기하고 놀라운 발명품을 구경하려고 몰려들었다.
최초로 전송되는 공식문장은 믿음 좋은 그의 오랜 친구의 어린 딸에게 선택권이 주어졌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와 모르스 아저씨를 통하여 사무엘 모르스의 일생을 지탱하고 그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준 분이 과연 누구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그 내용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믿음의 고백이었다.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뇨」 민수기 23장23후반절의 이 말씀은 이렇게 전신기를 통하여 모르스의 부호로 최초로 볼티모어에 전해졌다. 모르스 부호란 점과 선으로 알파벳을 표현한 아주 과학적인 기호였다. 전신기는 이 부호들을 종이에 써 내려갔던 것이다. 이 내용을 수신한 볼티모어에서는 다시 꼭 같은 내용을 워싱턴으로 보냄으로써 통신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이 커다란 사건은 단번에 모르스를 유명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더욱이 전신기가 산업화됨에 따라 엄청난 물질적인 부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시기하는 일부 사람들은 발명가로서의 그에게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으려고 소송을 걸기도 하였지만 미국 대법원은 모르스야말로 1837년이래 완벽한 전신기를 개발한 유일한 발명가임을 확인해주었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자만하거나 이 모든 과정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도 의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오직 그분만이 나의 이 모든 시도를 통하여 지금의 나를 이 위치에 이르게 하셨을 뿐이다. 영광 받으실 분은 오직 우리 주님일 뿐이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동생에게 고백하고 있다.
만일 그가 최초로 송신한 말이 「미국국민 만세다」식의 극히 평범한 감격의 표현이었다면 아마도 그는 평범한 과학자로 남아 이곳 「크리스천 과학자들」난에 등장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뒤돌아보면 이렇게 사소한 결정이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는 경우를 우리는 상당히 많이 목격하게 된다. 지극히 작은 일에 관심을 가지신 우리 하나님이 아니신가(눅 16:10, 마 25:40).
아무튼 사무엘 모르스가 전신기를 통하여 최초로 송신한 말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이었다는 것은 미래의 전기통신시대와 더불어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되고 기념될 것이다.

---------------------------------------------------------------------------------
좀 깁니다만 대단한 크리스천 과학자였군요 뭐 그때는 다른 종교도 없었겠지만...
어느 교회 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